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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날, 신도림텍스트 - 즉흥설치
 

즉흥 설치 퍼포먼스 / 붉은 흙 / 2013

서무날, 신도림텍스트 / 신도림예술공간 고리, 구로문화재단

신도림역과 쇼핑건물을 잇는 지하보도에서 매일 3일간 오후 5시 30분부터 약 30분간 이루어진 즉흥설치.
파주에서 훔쳐온 붉은 흙을 7개의 포대자루에 넣어두고 사람들이 쏟아져 나올 시간 즈음인 5시 30분이 되면
지하보도 대리석 바닥에 흙을 쏟아 붓고 기분대로 모양을 만들었다.
흙을 펼쳐 놓은 후 그 자리에 앉아 붉은 흙이 펼쳐진 지하보도와 사람들의 풍경을 글로 썻다.

 


 

6시 36분 저녁
귀뚜라미 소리가 들린다. 귀뚜라미는 보이지 않는데 가까이 있는 듯 크게 들린다. 멀리서 음악소리. 검은 무리의 사람들은 이쪽
아니면 저쪽으로 지나간다. 갑자기 귀뚜라미가 사라지고 새의 지저귐 소리가 들린다.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소리가 새의 지저귀는 소리를 묻어 버린다.
붉은 봉우리의 산들. 사람들은 그 산들을 못 본척 지나간다.
한 어린 여자아이가 붉은 봉우리의 돌 하나를 주워 올린다. 그 돌은 부서지기 쉬운 돌이어서 그 아이의 손 안에서 금새 부드러운
가루가 되어 붉게 흘러 내린다. 아이는 흘러내려 바닥에 흩뿌려진 흙을 금새 잊어버리고 저만치 뛰어가버린다.
사람들은 봉우리들을 스쳐지나 기둥과 기둥들이 만들어 놓은 통로 사이를 스쳐 스쳐 지나간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지나가고.붉은 봉우리들도 이렇게 봉우리인채로.
젊은 남자들은 거친 말을 하지만 호기심어리게 봉우리를 바라본다.
멀리서 들려오던 음악이 서서히 사라지고 이제 사람들의 웅성거림만 들린다.
한 어린아이가 봉우리의 흙을 뭉쳐 무언가 만들었다.
빵. 땅 속의 차가운 온도와 습도가 붉은. 땅 속의 온도가 원래 이런 것인가? 봉우리의 흙들은 축축함을 유지하며 붉은 빛을 발하고 있다. 두명의 노인이 흙을 탐하며 흙을 먹으려 한다. 하지만 이내 주변의 눈을 의식한 듯 먹기를 포기한다. 다시 멀리서 들려오는 새소리. 검은 한무더기의 사람들. 봉우리를 한 걸음으로 넘어서는 여자 거인.

 

6시 29분 저녁
땅을 밟는 두 여자들. 그녀들의 발자국이 흙 위에 선명하게 찍힌다. 땅 바깥으로 나온다. 검은 옷의 사람들은 땅 바깥으로 다닌다.
땅에 발이 스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땅은 잘 보이지 않는다. 우리 시야의 가장 아래 이여서 일까.
흙 위에 또 하나의 발자국이 생긴다. 발자국은 깊고 선명하다. 또 하나의 발자국이 찍힌다. 발자국이 겹치고 겹치고 겹치고. 누군가의 발이 땅위를 가볍게 발길질하니 고운 흙의 가루들이 발자국을 슬며시 덮어 버린다. 겹치고 덮여지고 겹치고 덮여지고. 기억.
아직 사람들의 행렬이 계속 되고 있다. 사람들은 이쪽 아니면 저쪽으로 향한다. 먹을 것을 찾는 사람.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본다. 하지만 그것을 아는 이를 찾을 수 없다.
엘리베이터가 또 한무더기의 사람들을 옮겨 왔나보다. 또 한무더기의 사람들.
한 남자는 이 땅 위에 무언가를 심으려 생각한다. 하지만 아마도 뿌리를 깊게 내릴 수 없을 것이다. 왜냐면 이 땅의 깊이가 매우 얕기때문에.
못 본 사이 쌓인 눈을 살며시 밟듯 조곤조곤 땅 위를 걷는 여자가 있다. 추운 걸까. 몸을 잔뜩 움추리고. 여자는 가볍게 밟지만 발자국은 선명히 박혀 있다. 지하의 천정 위로 목소리가 들린다. 남자의 목소리. 무어라 말하는지 잘 들리지 않는다. 땅이 너무 좁다. 더, 더, 더 넓은 땅을 만들려 했지만 흙이 모자란다. 또 다시 천정 어디선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지금이 몇시인지 알 수가 없다.

 

6시 59분 저녁
노래가 끝났다가 다시 시작한다. 가수를 둘러싼 사람들. 아이가 만들어 놓은 흙의 성벽과 언덕. 들판. 들판을 가로지르는 자동차. 붉은 바위를 넘어서는 자동차. 바위를 넘어서려 아이는 흙을 또 쌓아 언덕을 만든다. 흙이 만들어 놓은 구역들. 여섯개의 구역들. 가끔 구역을 보지 못한 사람들은… 구역을 넘어서 흙을 발로 찬다. 그러면 붉은 흙의 가루는 흩어져 경계를 흐린다. 사람들의 구두 아래 묻은 흙은 멀리멀리. 가수의 노래가 통로를 지나는 사람들을 두 갈래로 가른다. 사람들은 이쪽 아니면 저쪽으로 간다. 한 남자가 작게 흙을 모아 작은 언덕을 만든다. 아이는 만들어 놓은 성벽을 무너뜨린다. 여섯개의 흙의 구역들 사이사이로 높은 성들이 있다. 사람들은 성들 사이를 지나다닌다. 노래가 끝나가는지 서서히. 검은 코트의 남자가 흙의 구역들 사이를 천천히 조용조용 거닐고 있다. 얼굴의 표정 또한 조용하다. 노래가 끝나고 있다. 노래가 끝나면 이제 사람들의 웅성거림만 남을 것이다. 사람들은 지하에서 지상으로 나간다. 조금 후에 이곳엔 아무도 남지 않겠지. 노래가 끝나고 가수가 사라진다. 다시 두 갈래의 사람들은 흩어져.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소리.